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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한양도성 요충지 , '혜화문(惠化門)', 수리 ·보수 마치고 새 단장해 시민에게 개방
지난 22일 오후, 종로구 소재 현장에서 서울시 관계자 등 ' 복원 현판 제막식' 열어

  • 최초노출 2019.11.23 09.37 | 최종수정 2019-12-12 오전 11:07:55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재 한양도성 동소문인 혜화문의 복원한 새 현판 제막식 모습. (사진 김재룡 기자), 글 김영배 기자.


문화유산 '한양도성' 요충지 혜화문(惠化門)이 보수공사를 통해 단장을 마치고 깔끔한 모습을 훤히 드러냈다. 그간 공사용 비게 설치 등으로 관람이 다소 불편했던 점이 이날부터 완전 해소됐다.

 

서울시는 지난 22일 오후 2복원한 새 현판제막식을 하고, 혜화문 단장을 마무리 했음을 알렸다. 이날 행사에는 유연식 시 문화본부장을 비롯해 안중호 한양도성도감과장, 김오현 종로구청 문화과장 등 관계 공무원과 시·구의회 문화재 관련 상임위원 및 문화재 기술 관련자 다수가 참석했다.

 

이 보수 공사는 지난 5월부터 한옥협동조합이 시공해 완료 했다. 주요 내용은 <현판 교체=구 현판은 한글 필기 순서로 좌에서 우로 혜화문이라고 행서체로 각자했으나, 새 현판은 조선시대 원판 형태를 복원해 한문 해서체로 우측에서 좌로 각자>, <지붕 기와 교체>, <누각 마루 교체>, <도색> 등이다. 문화재 수명 관리 및 안전관리상 보호 일환으로 이뤄졌다.

 

이날 새 단장한 혜화문(惠化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 ‘4대문 4소문'중 하나다. 당시 성 구조는 사통팔달을 상징하는 8문 체계다. <4대문>은 동대문(東大門=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西大門=돈의문(敦義門), 남대문(南大門=숭례문(崇禮門), 북대문(北大門=숙정문(肅靖門)/숙청문(肅淸門)이다. <4소문>은 동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 북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서소문(西小門)인 소덕문(昭德門)=소의문(昭義門),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인 광희문(光熙門), 북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인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북문(北門)이다.

 

동소문으로 불리는 혜화문(惠化門)’은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307호가 주소다. 종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이 부근을 혜화문 고개또는 동소문 고개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동소문동이란 동명도 이에 기인한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리를 거쳐 경기도 의정부 및 양주 일대로 통행하던 요충이다.

 

문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翼工式) 우진각 지붕 건물이다. 모습은 문루 아랫쪽에 아치형 출입구를 육축(陸築)으로 쌓았다. 문루에는 낮은 담을 쌓아 몸을 숨기고 적과 싸울수 있도록 한 성가퀴(城堞)가 있다. 기둥사이에는 판문(板門)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鷲頭)와 잡상(7)를 뒀다.

 

원래 혜화(惠化)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인데 조선시대 여진족의 사신이 출입하던 곳이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사신 숙소 북평관(北平館)이 그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서울시는 22일 오후 종로구 소재 동소문인 혜화문의 수리 보수를 마치고 현판도 조시시대 것으로 복원하는 제막식 및 가준공식을 가졌다. (사진 김재룡 기자). 글 김영배 기자.


이 문은 조선 태조 59(1396)에 전체 한양도성 수축과 함께 건립돼 한양성 방호와 출입에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던 문이었다. 처음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리다가 87년 뒤인 성종 14(1483)에 창경궁의 동문을 같은 이름으로 지음에 따라 중복을 피하고, 혼동 방지를 위해 28년 후인 중종 6(1511)에 오늘의 혜화문으로 개칭했다.

 

그 후에 한때 문루가 유실됐다가 영조 20(1744)에 새 문루를 건축하고 천정에는 용 대신 봉황을 그려 넣었다. 부근에 새가 많아 새로 인한 단청의 훼손 방지를 위한 풍수 비보로 보인다. 이 문은 애초엔 도성 소문 중 하나로 지어졌으나 소용은 대문 못잖은 통행을 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높은 지대의 산등성이에 지어진데다 늘상 폐문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종반정 시 반정군이 월담한 사실로 인한 방호 강화도 목적도 있을 뿐더러 당시 조야가 맹신하던 풍수상 경복궁 주산인 북악산과 종묘 주산인 응봉으로도 지맥이 통하기 때문에 지맥 훼손 방지 차원이라고도 전한다.

 

당시 북대문의 상시 폐문으로 인해 동북방 거주 백성과 군사 통행은 죄다 동소문으로 몰렸다. 이 빈번한 통행량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때 돈암동 행 전차선로 부설과 도시 계획이란 명목 아래 문루와 아치형 홍예 석문까지 다 헐려서 역사에서 홀연 사라지고 말았었다. 이후 정부에서 1975년부터 1980년까지 6년에 걸쳐 차로를 피해 위치를 고지대로 옮겨서 문루와 성곽부터 우선 복원했다. 다만 누각은 1992년부터 3년 간 추가 시공해 오늘에 이른다.

 

위치상 도심 구간에 있어 현재도 통행인과 방문객이 많다. 관광철 주말의 경우는 도성 탐방객으로 500명 이상이 북적거린다. 산등성이 성곽 길이라 운동을 겸한 단체 관람객이 다수다. 이곳은 서울시 한양도성 관리부서에서 사업관리를, 종로구청 문화과에서 안전관리를 맡고 있다.

 

논설실 김영배,김태연, 김자안 주필 겸 상임고문 kimyb123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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