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뉴스

문화

[문화산책] 신선 사는 동천(洞天), 인왕산 아래는 백운동천 말고, 동천 또 있다..'누하동천'에 숨은 서예 작품
서울 종로 누하동 '청전 이상범' 화백 가옥 '누하동천(樓下洞天)' 내 소장 서예 작품 2점 소개

  • 최초노출 2021.07.17 12.22 | 최종수정 2021-07-22 오후 3:58:44

종로 누하동에 있는 청전 이상범 화백 가옥(국가등록문화재171호). 누하동천이란 현판과 뒤 배화여고 뜰에 심어진 회화나무 잎색갈에 맞춰 녹색 물감으로 써진 게 특이하다. 김영배 기자.
 

동천(洞川또는 동천(洞天)이란 말은?

동천이란 말이 있다. 동천(洞川) 또는 동천(洞天)이라고 쓴다. 전자는 지리적 현상을, 후자는 정신·철학적 개념으로 칭하는 것이라고 보여 진다. 후자 동천(洞天)이란 동천복지(洞天福地)의 줄인 말로써 중국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곳을 이름이다. 동굴이나 좁은 병속의 하늘과 같이 하나의 한정된 공간에도 우주를 압축 존재시킨다 생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북도 진안엔 전국에 유명한 백운동천(白雲洞川)이 있지만, 서울에도 한양 5대 경승 중 하나라고 하는 백운동천(白雲洞川·白雲洞天)이 있다. 인왕산 기슭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영조의 잠저 터 창의문 부근에서 경복궁 옆 자하문로를 흘러 청계천으로 입수한다. 중랑천 하류로 흘러들어 뚝섬부근에서 종래는 한강으로 합수하는 것이 백운동천이다. 지금은 복개돼 육안으론 보이지 않는다.

 

청계천 원류격인 최상류 백운동천(白雲洞川)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다고 전해 온다. 그러기에 가히 신선이 살만한 곳으로 비칭된 것 아니겠는가. 조선후기 한성부 역사지리를 기술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백운동천수(白雲洞川水)로 기재돼 있어 그런지 각종 역사·문화 공식자료엔 죄다 동천(洞川)으로 기술돼 있지만,

 

선비와 문인은 동천(洞天)으로 쓰고 불렀다. 구한말 문신으로서 독립지사·외교가·한학 서예 등에 능통했던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선생이 백운동 계곡에 새겼다는 백운동천(白雲洞天)’이란 각자가 생생이 입증해 보여준다.

 

이 백운동천 상류 부근에 누하동이 있다. 부근에 있는 경복궁 경회루(慶會樓)의 아랫 동네란 뜻이다. 위는 당연 누상동이다. 경회루는 조선말까지 한성부 제일 높이라 한양이 훤히 다 내려다 보이던 곳이다. 누하동 인근엔 유명했던 사람이 살던 가옥이 많지만 그 중에 한국화가 청전 이상범 화백 가옥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171호로 관리되고 있다. 공주 출신 이상범 화백은 소시에 상경해 미술학교를 다닌 후 대성해 소정 변관식, 의재 허백련, 심산 노수현 등과 함께 근대 한국 산수화의 4대가로 알려져 있다. 1972년에 타계했다.

 

오늘은 그림 얘기가 아니고, 이곳에서 발견한 서예작품 2점이 특별히 눈에 띄어 이 두 작품만 추적해 봤다.

 

▲하나는 청전(靑田)’이란 두글 자 액자다. 이상범의 아호를 쓴 것이다. 최대의 예우 작품이 아닐까 한다. 색이 진황색으로 바란 것을 보면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구한말에 활동하던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이다. 시기가 언젠지는 미상인 채 간결하게 어느 봄에 썼다고만 돼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민형식은 1875년 생으로 해방 직후인 1947에 사망했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화가다. 자는 공윤(公允), 호는 우하(又荷),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서울 출생으로 민씨 척족정권의 대표적 인물인 민영준(閔泳駿)에게 양자로 출계된 사람이다.

 

189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평안도 관찰사 · 법부협판 · 학부협판 등을 역임했다. 많은 관직을 거쳐 신민회(新民會) 회원이 돼 독립운동을 돕고, 반일운동에도 가담했다. 민족운동지 발행자금 및 각종 학회·학교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등 민족운동을 지원하기도 하다가 말년엔 돌연 친일행적을 보여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있으나, ·서에 능했다.

 

글씨는 안진경(顔眞卿)체와 특히 행서를 잘 썼다고 한다. 천학비재인 졸부 기자의 눈에도 이 작품에 대단한 필력이 서슬 퍼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껴진다.

 

그는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정대유 · 오세창 · 김돈희 · 안종원 · 이도영·고희동 등의 서화가들과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시··화를 통한 교류를 활발히 했다고 하니 그 무렵 또는 직후에 이상범 화백과도 친교가 있어 이 작품이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 서화에 능통했던 권력층 민형식이 1900년대 전반기에 청전에게 써준 것으로 추정되는 서예 작품. 김영배 기자.
 

또 하나는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의 작품 액자다. 소전이 원래 전서체 대가라 전서로 써져서 문외자는 해독이 쉽지 않다. 이른바 한문에서 유명한 문구인 梅經寒苦(매경한고). 梅經寒苦發淸香(매경한고발청향). 매화는 추위를 겪고 나서야 맑은 향기를 낸다는 뜻으로 계자서나 수양 글귀로 널리 통용된다. 앞의 네 글자만 짤라서 매경한고로 써도 된다. 이 말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시진핑에게 덕담으로 쓰기도 했다. 비온 뒤 땅이 굳어진단 말과도 상통한다고 보겠다원래는 人逢艱難顯其節(인봉간난현기절: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기질이 들어난다)이란 댓구와 같이 쓰인다.

 

이 소전의 작품은 작은 글씨와 낙관 부분을 잘 봐야 한다. 친동생 긍전() 손재복(孫在馨)도 탁월한 서예가로서 똑 같은 문구, 흡사한 필법의 작품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이 글귀 작품도 아주 똑 같은 게 더러 있다. 낙관부분에 있는 서명 소전과 긍전을 잘 읽어야 한다.

 

작은 글씨를 보면 <청전화백 아형 방가 신정 신축 원조 서어봉래제일선경 남창하 분매향처 소전>이라 쓰여 있다. 올해가 신축년이니 딱 61년차 환갑 된 작품이라 의의가 더 있다. 봉래제일선경은 진도에 있는 소전의 서실 별칭이다. 진시황이 찾던 신선마을 동쪽 봉래산이 진도일대란 말도 있나 보다. 아니면 차용했을 수도. 동생 손재복은 봉래제2선경이라고 쓰기도 했다. 방가는 전문가 또는 대가란 뜻이다. 청전이 1987년생이고, 소전이 1903년 생이니 청전이 6년 연상이다. 아형 인형 등으로 써도 무방하다.

 

소전. 소전의 명성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진도사람으로 서울에 와 사계 거목으로 성장, 각종 미술대회를 주도하고 소전체를 개발해 명작을 많이 남겼다. 박정희의 서예를 지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명 잡지 샘터’, ‘월간문학등의 제호도 썼다. 주요 작품으론 <이충무공동상명><사육신묘비문><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문> 등이 있다.

 

소전이 일본에까지 찾아가 일인으로부터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온 일화는 불후의 애국행위로 찬양받는다. 그에게 감명 받은 일인 부자(父子)가 무려 15000점의 추사 유물을 한국에 넘겨줘 과천에 추사 박물관이 조성되게 하기도 했다니 그 과정과 지성감천의 정신 알만하다. 8대 국회의원 도 지냈으나, 결국은 정치 실패로 인해 명품 다수를 민간에 매매했다고 하니 인간적 아쉬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진도에 그의 미술관이 있다. 소전은 청전보다 9년 뒤인 1981년에 타계했다.

 

한국의 유명 서예가는?

서예는 조상들이 즐겨하던 예술문화 활동이다. 신라-고려 시절엔 김생, 탄연, 최우, 유신 등 신품4현이 있었다. 최우(최이)는 무신정권 2대 종주인데도 문인 기질이 강했던 같다. 조선시대는 전기간 통틀어 4대 명필로 <한호 석봉>, <안평대군 이용>, <자암 김구>, <봉래 양사언>이 있다. 후기 명필가로 <추사 김정희>, <눌인 조광진>, <창암 이삼만>, <원교 이광사> 등이 있다


구한말 오경석 정학교 박태영 강위 홍승현 지운영 지창한 현채 김옥균 박영효 안중식 김가진 등을 비롯해 근대엔 소전 손재형, 일중 김충현, 갈물 이철경 등이 있다. 소전의 제자 그룹으로 원곡 김기승, 평보 서희환, 장전 하남호, 서봉 김사달, 학남 정환섭, 경암 김상필, 금봉 박행보, 우죽 양진니 등이 득명했다고 한다특이한 건 한국엔 형제자매 서예가가 많다. 위 <소전 손재형-긍전 손재복> 형제에다, <일중 김충현-여초 김응현> 형제가 있고, <갈물 이철경-꽃뜰 이미경> 자매 등이 크게 일가를 이룬 유명인이다. 타고난 천부에다 형과 언니가 하니 따라서 한 걸로 보인다.

 

▲정치인의 서예 활용은?

근대 유명 정치인나 명사들은 서예를 정치 연출 도구로도 활동했다. 안중근 의사의 옥중 필적은 다수가 현존해 세계적으로도 알려졌다. 상당수 일인 간수들이 이 위대한 인물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간청해 필적을 받아 가보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見利思義 見危授命(견이사의 견위수명)',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 등이 널리 알려졌다. 김구 선생 글씨도 많다. 독립군 군자금 모금에도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손떨림에 따른 충체(蟲體)로 유명하다. 이승만도 작품을 더러 남겼다.붓을 눕혀서 쓰는 노봉법(露鋒法)이란 일본 서체라고 알려졌다. 박정희도 기술혁명’, '자조협동', '새마을운동, 등 수많은 액자와 건물 초석· 현판 등을 남겼다. 그의 가짜 작품이 경매에 고가로 나오는 등 폐단도 있었다.


야당 오래했던 3김씨도 서예 작품을 다작했다. 김영삼의 대도무문’·‘무신불립’, 김대중의 경천애인’, 김종필 충성다짐 작품 등이 시중에 상당히 굴러다닌다. 그런데 가장 특이한 건 소위 살인마란 소리까지 듣는 전두환이다. 전씨의 글씨가 정치인 중 상당히 수준이 높다고 한다. 일중 김충현에게 예서체를 독실히 배워 수준에 오른 것으로 보는 평가다. 위 고려 무장 최우의 경우도 있었지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근대 한국 제일 명필로 알려진 '
소전(素荃손재형(孫在馨)'이 쓴 '' 서예작품 액자다. 청전화실 정면 벽 창틀 위에 걸려 있다. 신축년에 썼으니 올해가 육갑을 한순 돌아 딱 61년 째. 사람으로 치면 환갑인 셈이다. 김영배 기자.
 

▲사족으로 서예 및 동아시아 각국의 서예 교육 실태를 좀 더 살펴본다.

주로 한자나 그것과 겸용되어 사용되었던 문자류에 한글 일본 글자, 베트남 글자 등을 창작적으로 쓰는 것이 서예다. 한자는 중국 대륙에서부터 동양 여러 개 국가에서 현재에 이르기 까지 수천 년간 쓰인 문자로, 서예의 역사도 이에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발원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히는 사람은 4세기 동진(東晉)시대 왕희지다. 모든 서체에 발군해 서성(書聖)이라고도 부른다. 난정서라는 작품 글씨가 유명하다왕희지 이후 당나라 때 유명한 서예가로 구양순, 안진경, 우세남, 저수량 등이 있다. 구양순의 대표작에는 구성궁예천명, 안진경은 근례비, 우세남은 공자묘당비, 저수량은 안탑성교서비 등이 있다. 당 이후에도 역사의 대를 이은 서예가로서 유공권, 미불, 황정견, 조맹부, 동기창, 유용, 하소기, 옹방강, 등석여, 섭지선, 오창석 등 제씨가 유명하다. 


한자문화권인 중국, 대만,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 동시 다발로 발전해 왔다. 과거 사대부들의 필수 소양이던 시서화 중 서가 서예다. 한국에서는 書藝(서예), 중국과 베트남은 書法(서법). 일본에서는 書道(서도)라고 쓴다. 서예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도 현대 대표적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한다. 경기대 장지훈·김혜란의 논문(한국 대학의 서예교육과 교원양성 실태 : 경기대학교를 중심으로) 에 의하면, 한국 서예전공 학과는 1989년 원광대 서예학과의 신설을 기점으로 계명대(1992), 대구예술대(1995), 대전대(1998), 호남대(2000), 경기대(2003)로 이어졌다.

 

이 서예학과 신설과 부흥은 8개 대학의 대학원 신설로까지 이어져, 30년간 2,500여명의 서예전공자가 배출됐다. 이처럼 대학의 서예학과가 신설된 이래 도제식 서예교육과 차별화된 전문교육을 받은 서예전공자가 급증했다.

 

최근 10년 간 중국은 대학 서예전공 학과가 200여 곳이 신설돼 정부에서 서예교육을 권장하고 의무화하면서 체계적인 초·중등 서예교육의 기반을 마련해나가고 있다. 일본 또한 오래 전부터 초·중학교 서예가 국어교과에 의무화돼 있는 가운데 고등학교에서는 예술계열로 분류되어 서예교육을 심화해 왔다. 베트남도 하노이 탕룽 대학교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많은 전공자의 배출에도 불구하고, 의무교육 과정에서 국가적 차원의 서예교육 정책이 부재하다. ··일 가운데 유독 한국만 서예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없는 실정이다. 이들 외국과는 상반되게 최근 10년간 한국의 대학 서예학과들은 폐과를 맞으면서 현재는 경기대, 대전대, 호남대 서예학과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외국과는 상반되게 미술교과 내 서예교육에 대한 비중과 중요도가 떨어졌다. 이에 대학의 서예전공자들이 서예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나 활로는 서예학과의 활성화에 비해 크게 확장되지 못한 실정이다.

 

한국 서예 교원은, 대학 서예교원, 학교 서예교원, 기관 서예교원, 학원 서예교원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대학 서예교원은 대학 서예학과의 교·강사로서 서예전공자의 극소수가 종사하고 있다. 학교 서예교원은 미술교사, 예술강사, 서예강사 등으로 분류되는데 원광대, 호남대 등에서 교직이수를 하거나 교육대학원을 통해 미술교사 자격증을 취득하더라도 서예전공자가 미술교사로 채용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특히 한국은 서예교사라는 직위나 명칭 자체가 없기 때문에 서예전공자의 대부분은 예술강사 및 서예강사로 진출해 초·중등 미술교육 내 서예교육과 방과 후 서예교육 등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그 가운데 경기대 서예학과는 교직이수가 별도로 없기 때문에 졸업 후 서예교육의 현장으로 곧장 투입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서예전공자들이 사회에 진출해 보다 전문적인 서예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교과 및 비교과를 통한 서예교육의 활성화방안을 마련해 오고 있다.

 

▲서예를 통한 국민 정신문화 개조운동은 어떤가?

지금은 서예가 사양화 돼 동네마다 있던 서실이 자취를 감췄다. 극도 물질문명 경제사회에서 상실돼 가는 인간성 회복에 예술문화가 핵심이라면 그중에서도 서예문화의 활성화가 관건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예는 단순히 글 쓰는 게 아니다서자심지화(書者心之畵)’, ‘書卷氣文字香(서권기문자향)’이란 말에서 보듯이 우선 학문과 인품이 동반돼야 한다. 이 타락무도한 몰지성 시대를 끝내는 명약이나 비법으로써의 서예문화 재림이 절실하지 않나 싶다.


청전화숙(靑田畵塾)으로 불리는 곳으로 청전 이상범 화백이 평소 사용하던 화실이다. 여기서 작품활동을 하고 박노수·배렴 등 후대 유명화가를 다수 배출한 유서깊은 곳이다. 김영배 기자.
 

주필실 김영배 주필 겸 상임고문 kimyb1236@gmail.com

Loading
작성자
비밀번호

국민안전

더보기

SECURITY

더보기

라이프

더보기

신문사알림

더보기